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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 Haru/TV 영화 드라마 리뷰

영화 1987 실화 박종철 최환검사,황적준박사 박종철기념관 안유 교도관


영화 1987은 1980년대 우리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결정적인 사건을 다뤄요 장준환 감독! 1987 실화!

 영화 보자고 하니 남편이 감독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감독 이야길 하니 "오~ 볼래볼래" 
장준환 감독은 배우겸 감독이죠? 문소리씨의 남편인데요. 문소리씨가 만들었던 영화에도 남편으로도 잠깐 등장^^ 깨알같은 부부입니다. 

 
 


영화 1987은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을 다룹니다.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인데요. 제가 태어난 시기입니다.^^: 관련 기사나 영화 등 인터넷에서도 자료는 정말 많이 찾을 수 있더라구요. 이렇게 스스로 찾지 않으면 제대로 알 방법이 없네요. 정리하며 쓰다보니 지금 가진 투표권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직접선거 이후 바로 다음해, 1972년 박정희 전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15년동안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개월 이후, 이한열 최루탄 사건, 권인숙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과 함께 (궁금하신 분은 찾아보시는 것도 좋겠어요!) 독재타도, 민주주의를 외치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리고.. 6월 항쟁 직후 6월 29일에 당대표인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는 6.29선언을 합니다. 이로써 국민들은 다시 투표권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당의 승리로? 그런데 후에 이를 민주진영 절반의 승리라 합니다. 왜냐하면 그해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지만 당시 양김,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표가 분산되고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정권을 가져가게 됩니다.



 



사건은 87년 1월 13일에 시작됩니다.

- 13일-

서울대 언어학과 박종철은 하숙집에서 연행 되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갑니다. 왜 때문이죠? 대학선배 박종운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경찰은 박종철을 조사하면 박종운 소재 파악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켜낸 박종운은 이후에 한나라당(현새누리당) 에 들어가 정치인됩니다..)





 - 14일 -


 - 남영동 대공분실 -
어제, 13일 하숙집에서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박종철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차례로 받고 하루만인 14일 오전 11시 20분에 쓰러집니다. 11시 45분경 용산중앙대병원에서 오연상의사가 도착해 30분넘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습니다.


- 중앙대 병원 -
 박종철은 

중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심정지 상태였습니다. 당시 최초 박종철군의 사체를 본 의사 오연상씨는 처음에는 고문관련을 부인하다가 나중에 양심선언을 합니다. 물 고문흔적이 있었다고.. 

박종철군의 사체를 두고 유족과의 합의도 없이 서둘러 화장하려고 했으나 담당검사 최한, 최한검사는 그러한 경찰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당연히 유가족의 허락이 있어야하니까요. 동의없이 그럴려고 했다니;
최환검사는 말합니다.
"안돼. 정상적으로 처리해, 부검도 다 하고!" 



영화 남영동1985세트장





 
 
 - 15일 -


 - 부검 -

 다음날 15일 바로 부검을 합니다.
부검실에는 박종철의 삼촌, 한양대학병원 박동호교수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국립과학연구소 법의학과 과장이었던 황적준박사가 부검의로.

 후에 밝혀졌지만 당시 황적준박사의 윗선으로 고문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하며 돈봉투 함께 전해 졌다고 합니다. 황적준박사에게도 압력이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적준 박사는 부검 감정서에 고문에 의한 경부압박 질식사 라고 정확하게 기재 했던 것입니다.
(폐에도 당연히 물이 찬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적준 박사는 이 사건으로 국과수를 나와야 했습니다. 후에 이 사건이 재조사 될 때 당시 쓴 일기 또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6:10분에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정의의 편에서 부검 감정서에 쓰겠다고 했답니다.




 
 
- 경찰-

한편 경찰에서는 박처원 치안감이 사망부검 결과를 브리핑 합니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라고.. 이 말은 두고두고 정권을 조롱하는 희대의 명언이 됩니다. 



 

- 언론 -

당시 정권은 보도지침이 있었습니다 기사를 어떻게 쓰라는 지침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중앙일보에서 관련 기사를 냅니다. 1987년 1월 15일 사회면 2단기사로 실립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손바닥만한 지면 이었지만 당시로는 이것도 대단한 것 이었죠. 이 기사를 쓴 건 신성호기자. 그는 검찰 간부방을 지나가다가 그방 간부의 혼잣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 경찰들 큰일났어..' 이 말을 듣고 기자의 촉으로 파고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쉬쉬하는 사건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신성호기자는 취재를 위한 기지를 발휘합니다. 사건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경찰들 큰일날텐데 다 알면서 왜그랬나 몰라~” 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아 남영동 거기~ 거기~ 그 대학생~" 이라고 말하며 조금씩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신성호기자는 그런 정보들의 조각을 모아 퍼즐 맞추듯 맞추어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 16일 -

너무도 조촐한 장례 후 시신은 서둘러 화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임진강의 어느 샛강에 뿌려 졌습니다.
박종철군 아버지(박정기)는 




 
 "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허공을 가득채운 박종철군 아버지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지게됩니다. 여론은 들끓었고 경찰은 이를 잠재우려 합니다. 고문에 가담한 두명, 조한경강진규를 구속함으로 꼬리자르기를 시도합니다.





 - 17일 -


 -영등포 교도소-
수사관들이 조한경, 강진규에게 특별면회신청을 합니다. 그런데 기록도 남기지 말고 감시원도 동행도 하지 말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씨는 그렇게 할 수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기록에는 남기지 않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면회는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안유계장은 현장에서 듣게 됩니다. 수사관은 조한경, 강진규에게 1억원을 주고 가족생활을 보장해줄테니 입다물고 있으라 했던 것입니다. 이를 들은 안유계장는 대학생을 고문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죄를 꼬리자르기로 덮으려는 하는 것을 보고 분개합니다. 당시 같은 감옥에 수감중이던 이부영 전의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게 됩니다. (당시 민주화를 외치던 많은 사람이 수감 되었죠)




이부영전의원도 동아일보 기자출신입니다.
조한경 강진규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성경책을 보면서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분명히 뭔가 있다고 촉을 느낀 터였죠.




 
 - 19일 -


 경찰에서는 계속해서 말단의 조한경, 강진규의 꼬리자르기로 사건을 덮으려 합니다. 이에 정치권에서 1987년 1월 19일, 김대중, 김영삼, 함석헌, 홍남천 등 각계인사 9782명이 박종철군 국민추도위원회 발족을하여 강경한 대정부투쟁에 들어갑니다.





 
 - 이 후 -


 
 이부영전의원은 영등포교도소 안유계장에게서 들은 사실을 당시 정권초기 김영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김정남에게 편지를 쓰게됩니다. 꼬리자르기와 1억원 회유 사실을 최초로 밖으로 알리게 됩니다. 
 편지를 받은 김정남씨는 이 사실을 폭로해야하는데 야당국회의원 중 어느 누구도 무서워서 나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정남씨는 그 편지를 들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으로 가서 부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천주교 신부님들이 5.18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행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게 됩니다.





 불과 30년 전 일입니다.


 그 시대의 모든 부모님들이 그랬듯 박종철군의 아버지도 자식이 대모하는 걸 싫어하셨습니다. 엄혹한 시대였으니 행여 무슨일이라도 생길까봐 자식걱정에 말리셨던 것이죠.. 박종철군은 그런 아버지와 많이 다퉜던 것 같아요. 박종철군이 감옥에서 부모님한테 쓴 편지가 있습니다. (박종철 편지)


 
 클릭 - 박종철 옥중편지





 
 이 후 경찰은 자체조사하겠다고 했으나 결과를 묵인했고 검찰도 별도의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사건조작과 은폐는 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6.29선언으로 투표권을 다시 가져오고 민주주화의 발판으로 작용되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그를 추모하는 박종철 기념관과 옛조사실이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 내 박종철기념관(4층)과 옛조사실(5층)이 기념관이 되어 개방되고 있습니다. (월요일은 휴관) 평일에만 개방하다가 올해 6월부터 토요일도 평일과 똑같이 오전 9:30분부터 오후 5:30분까지 개방한다고 합니다. 당시 박종철 열사의 유품과 1980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언론보도 자료등이 전시되어 있어요.




 



  

1987 최검사 최환검사 하정우
1987 사회부 윤기자 신성호기자 이희준
1987 교도관 한병용 안유 유해진
1987 치안총감 치안본부장 우현
1987 안기부장 장부장 문성근
1987 대공수사처 조반장 박희순
1987 박종철아버지 박정기
1987 박종철삼촌 조우진
1987 이한열 강동원

1987 박종철 여진구


1987 배우들 입니다!




클릭>> 박종철 옥중편지

클릭>> 황적준 부검의 박종철 부검감정서 (1987年1月19日)

클릭>> 법의학자의 양심 황적준에겐 스승 문국진이 있었다.




찾다보니 감동적인 기사가 있어 링크걸어요

클릭 '박종철 고문사'밝힌 검사와 의사,
30년만에 만났다' _ 20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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